하린이의 마지막 인사
하린이의 마지막 인사
찌꺼기.
껍데기만 남아있다. 하린이를 떠나보낸 후부터.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사귄 여자에게 나는 정말 더럽게, 호되게 당했다. 야한 외모에 톡톡 튀는 성격을 가진 그 여자는 갑작스럽게 다가와 번호를 물었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놀러 가고, 같이 잤다. 전광석화처럼 일이 벌어졌고,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된 나는 그 여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야, 지환아. 그 여자 좀…”
“지환아. 어제 네 여자친구하고 다른 남자하고 돌아다니던데.”
“넌 왜 그런 여자를 만나냐?”
친구들이 건네는 말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발랑 까진 년. 그게 바로 그 여자였다. 하지만 눈에 콩깍지가 쓰인 나에게 그런 말들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콩깍지가 벗겨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은 엿 같은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쓰레기가 내준 리포트를 쓰느라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박혀 있었다. 겨우겨우 끝내고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다려도 그칠 기미가 없어 집까지 가는 걸 포기하고, 그 여자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전화도 없이 가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문 앞에 서서 열쇠를 돌리려는 순간, 방 안에서 익숙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흣~ 좋아… 좋아~~ 자기야…! 더… 더…!”
“흐흐… 씨발… 좆걸레, 갈보 년아!”
“아흥~ 좋아~ 더… 더 욕해줘…!”
“크크… 진짜 걸레 같은 년… 죽어라 이 씨발 년아…!”
그건 분명히 내 여자친구의 목소리였다. 항상 내 밑에서 나를 위해서만 신음하던 그 목소리. 그런데 지금, 방 안에서는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가 함께 울리고 있었다.
퍽퍽 거리는 육중한 소리. 내 마음을 뒤흔드는 그 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은 원룸에서 그 여자는 개처럼 엎드려서 그 남자의 자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 하아앙…! 좋아~ 좋아~”
“크크… 씨발 년이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왜 그리 튕겨? 이 개 같은 년. 넌 정말 타고난 창녀야 이 씨발 년아…!”
“맞아요… 아앙… 으흥… 창녀에요…”
그 남자의 폭언이 그녀를 자극하는지, 창녀라는 말을 듣고도 몸을 떨면서 그 남자의 자지를 더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씨발… 씨발…
“요즘 남자친구 생겼다던데? 이 씨발 년이 허락도 안 받고 네 주제에 누굴 만나? 이 갈보 년아…!”
욕이 안 들어가면 말을 못 하는지 그 남자는 계속 지랄을 하며 엉덩이를 때렸다. 그녀의 탄력 넘치던, 내 자지만을 받아줄 것 같았던 엉덩이가 푸들푸들 떨리며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악…! 아파요… 자기야 아파…!”
“대답을 하라고 씨발 년아!!”
그 개새끼는 더욱 그녀의 보지를 쑤시며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라며, 내가 아닌 그놈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어때? 좋았어? 그 씨발 놈 자지?”
“네~ 좋았어요. 그 씨발 놈 자지… 볼 것도 없는 놈이었는데 자지는 아응… 꽤… 괘, 괜찮더라고요… 하응 거기…”
“어쭈? 이 년이. 씨발 년아 그 씨발 놈이 좋냐. 아니면 이 서방님이 좋냐?”
“하응~! 그런 걸 왜 물어요?”
“이 씨발 개 좆같은 년이 물으면 대답해! 이 똥갈보 년아!”
그 개새끼는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보지를 더욱 세게 쑤셨다. 한참 동안 그 연놈들의 섹스는 계속됐고,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내 첫 여자였던 그 씨발 년을 떠나보냈다. 다음 날 헤어지자고 하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왜 그러냐며 가식적인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씨발… 똥갈보 년이라면서. 네 년.”
이미 전날 밤에 그 남자에게 깔려서 자기는 창녀라고 소리를 지르던 그년의 진짜 모습을 보고 나니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처음 사귄 여자에게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 나니 나는 도저히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충고해주던 친구들 보기도 민망하고, 더 이상 그년과 함께 다니던 캠퍼스를 거닐고 싶지 않아 입대를 결심했다. 군대에서 2년을 구르다 전역했다.
군대에서 까이고 구르고 짓밟히다 보니 그년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졌다. 전역할 때쯤에는 그 모든 기억을 내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복학 후 나는 조금은 철이 든 것 같았다. 장학금을 목표로 새벽까지 공부하고, 시간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병식이가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
“야. 지환아. 너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
“뭐? 내가 사는 게 어때서?”
“너… 에휴… 그렇게…”
병식이는 내가 어떻게 군대에 갔고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말을 하다 말다 하면서 결국 소개팅 얘기를 꺼냈다. 아직 여자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지만, 한 번 만나보기나 하라는 그의 성화에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정말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여자였다. 병식이 말대로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착했다. 그년과는 정반대의 성격. 난도질당한 내 가슴을 보듬어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첫눈에 끌린 하린이와의 만남이 이어질수록 나는 그년이 남긴 상처와 여자들에 대한 불신이 점점 사라져갔다.
처음 하린이의 손을 잡은 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하린이에게 키스를 한 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하린이가 가슴을 허락한 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하린이의 엉덩이를 만진 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하린이의 옷을 벗기고 섹스를 나눈 날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처음이 아니었다. 그게 나한테 미안했는지 내 정액을 받아놓고서 내 품에 안겨 펑펑 울어댔다.
“오빠… 흑… 흑흑… 정말 미안해… 나… 정말 더럽지…?”
요즘 세상에 처녀가 있긴 한 걸까? 그런 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나였지만,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내가 더욱 미안해졌다. 울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하린아… 괜찮아. 오빠, 그런 거 신경 안 써… 정말이야.”
“흑흑. 나. 진짜 오빠한테 너무 미안해. 흑. 오빠하고 만나면서도 오빠 속이는 것 같고. 정말로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나 버릴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
그 후 하린이에 대한 사랑은 더 커져만 갔다. 내게 처음을 주지 않았다고 더욱더 하린이는 나에게 헌신적으로 대했고, 그런 하린이를 다독이면서 우리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우리는 추억을 만들어갔다.
하린이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만나지 못한 일요일.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진우를 만나 한잔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진우가 나를 붙잡고 좋은 곳이 있다며 자꾸 끌어당겼다.
“아~ 참 거 일단 따라와 보라니까.”
“아~ 진짜 이 새끼야. 나 여자친구 있다니까.”
결국 진우를 따라간 곳은 서울 외곽의 오피스텔이었다. 들어가 보니 평범한 오피스텔처럼 보였지만, 방 안은 화려하게 꾸며진 호텔 같은 느낌이었다. 고급스러운 침대, 작은 냉장고, 때밀이 침대까지 갖춰진 샤워실.
“아… 씨발… 괜히 따라왔나? 하린아… 젠장…”
속으로 하린이에게 미안해하며 마음 한구석에 야릇한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하린이한테 더 잘해주면 되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처음이자 마지막.”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 안녕?”
처음 본 남자에게 오빠 소리를 하며 콧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에 자지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다가와 팔짱을 끼고 젖가슴을 팔에 문대며 웃었다.
“호호~ 오빠 되게 순진.”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늘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하린이가 맞다.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던 목소리가 내가 알던 그 목소리로 바뀌었다.
“오, 오빠.”
하린이다. 하린이가 맞다. 그 착하고 순수해 보였던, 처녀가 아니라며 미안해하며 펑펑 울던 그 하린이가 지금 여기서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린이가 눈물을 흘렸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서로를 마주 보며 울다가 하린이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하린이를 안아줄 수가 없었다. 하린이를 처음 가진 날 울었을 때처럼 안아줄 수가 없었다.
하린이는 통곡하듯 울다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나를 보며 웃었다.
“오빠. 흑. 이런데 처음인가 봐?”
“…?”
“오빠, 되게 멋지게 생겼는데?”
하린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내던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왜 이래 하린아…
“헤헤. 오빠 내가 오늘 서비스 잘 해줄게.”
하린이가 갑자기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진짜 오빠 애인처럼 똑같이 해줄게.”
나는 옷을 벗고 있는 하린이를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눈물이 맺힌 눈으로 하린이를 쳐다보았다. 지금 하린이는 내 눈에서 뭘 보고 있을까. 나는 어떤 눈으로 하린이를 쳐다보고 있는 걸까.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목이 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웃어 보이는 하린이를 두고 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하린이가 뒤에서 말했다.
“오빠… 흑흑… 어디가?”
“…”
“오빠… 나 유리야… 하린이 아니거든… 유리거든…”
“…”
“오빠… 흑흑… 오빠… 나 유리라고!! 오빠가 아는 그 여자 아니고, 유리라고… 흑흑… 하린이 아니라고. 유리라고…!!!”
울부짖으며 유리라고, 하린이 아니라고 외치는 하린이를 두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씨발… 하린이, 하린이가 아니라 유리라고… 씨발…
눈이 시뻘게져서 계단을 내려오니 김 부장이라는 개새끼가 보였다. 저 새끼가 그 순진한 하린이를 꼬셔서 이런 데서 더러운 일을 시키고 있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해 있는 김 부장의 면상에 냅다 주먹을 꽂았다.
합의금을 물어주고 경찰서 밖을 나왔다. 부모님은 한숨만 내쉬며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에휴… 정말…”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하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하린이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보았지만 하린이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유치장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하린이를 그렇게 만든 건 나다. 내가 그곳에 찾아가지 않았으면 하린이는 그 깨끗한 모습 그대로 언제까지나 내 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린이는 그대로다. 더러운 건 나다. 그녀의 믿음을 배신하고 그런 곳에 찾아간 내가 더 더럽다. 나 같은 인간들이 하린이를 망쳐놓은 것이다. 내가 하린이를 더럽힌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나는 하린이를 사랑한다. 그런 곳에서 일했던 아니던, 나는 하린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 하린이가 보고 싶다. 하린이의 얘기를 듣고 싶다. 그런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쾌락에 몸을 맡겨 가랑이를 벌린 그 첫 번째 여자하고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 하린이를.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린이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린이는 내 가슴에 커다란 못을 하나 박아놓고 떠나가 버렸다. 지금 그 못은 녹이 슬어 뺄 수조차 없게 변해 있다.
가끔 만나는 진우는 아직도 내게 묻는다. 대체 그때 왜 그런 거냐고.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는다. 하린이와 나만의 비밀. 아마 죽을 때까지 말할 수 없겠지.
나는 찌꺼기. 껍데기만 남아있다. 하린이를 떠나보낸 후부터.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녀가 박아놓은 못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그 못을 가슴에 둔 채로 살아왔다. 못을 박은 채 공부를 하고 졸업했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도 이미 녹슨 못은 단단히 박혀 빠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응~ 으응.. 여보.. 사랑해요.. 사랑해요”
내 밑에서 아내가 사랑한다며 속삭인다.
3년. 3년 전에 아내를 맞선으로 만나 결혼했지만 하린이가 남겨놓은 못 때문에 아내를 내 안으로 들일 수가 없다. 무표정하게 허리를 움직여 아내의 보지 안에 내 정액을 흩뿌린다. 일부러 그녀의 가임기에는 섹스하지 않는다.
아내는 착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정숙했다. 마음을 열지 않는 나에게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왔고 사랑한다며 표현했지만, 그놈의 녹슨 못은 하린이를 잊지 못하게 통증을 보내왔다. 하린이를 마지막으로 본 일요일 저녁에는 언제나 못이 덜컹거리면서 나를 힘들게 했다.
한숨을 쉬면서 내 옆에 누워 나를 바라보며 아내가 말을 건다.
“여보.. 저.. 우리 내일 같이 나가요.”
일요일마다 집에 틀어박혀서 외식은커녕 온종일 누워있기만 한 나에게 그녀는 큰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잘 견뎌왔지만, 요즘에는 점점 힘이 드는지 이런 식으로 섹스 후에 부탁을 해왔다.
“싫어.”
언제나 그렇듯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싫다고 말해버린다.
“네..”
저번에 끈질기게 부탁하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싫다는 말 한마디에 수긍하면서 뒤돌아 눕는다.
“흑.. 흑흑..”
아내의 어깨가 들썩거리면서 결혼 후 처음으로 우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 그렇게 냉랭하게 대해도 배시시 웃으며 미소만을 보이던 아내가 운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아니, 사랑해주지 못하지만 내 아내가 흘리는 첫 눈물을 보고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젠장..”
일요일마다 우울해지는 내 마음을 달랠 길은 그저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을 쳐다보는 것인데. 젠장. 젠장.
“울지마.”
아내의 눈물 때문인지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상냥한 말을 건네며 뒤에서 안아준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커진다.
“으흑.. 흐윽.. 흑흑.. 흑흑..”
아내가 아기같이 울면서 몸을 돌려 안겨 온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내일 나가, 나가자고.”
“흑.. 흐윽.. 정말요?”
“그래. 나가자, 나가.”
“헤헤. 여보 사랑해요.”
울다가 웃다가. 아내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표정을 금세 바꿔가며 안겨 와 사랑한다면서 매달려 온다.
아내와 밖으로 나가 외식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아내는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지만 언제나 그렇듯 일요일 저녁이 되니 녹슨 못이 나를 괴롭힌다.
아내가 백화점에 가자는 말에 싫다고 할 수도 없어 알겠다고 말하며 따라갔다. 아내는 기쁜지 웃으면서 팔짱을 껴왔다. 백화점에 도착해 이것저것 살피는 아내. 아내는 웃으면서 이것저것 몸에 옷을 대보면서 어떠냐고 물어오지만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아내가 입지도 않을 옷을 들춰보면서 살피다가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한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아기 옷 매장이 보인다. 아기를 가지지 않는 나를 향한 소심한 반항이며 항변이다. 아내가 아기 옷을 살피면서 이거 너무 예쁘다 저거 너무 귀엽다며 호들갑을 떤다. 멀리서 한 가족이 다가온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있고, 여자의 손에는 귀여운 여자애의 손이 잡혀있다. 그 여자의 배는 임신을 한 듯 부풀어 올라 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보았다.
그녀다. 내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 떠난 그녀다. 하린이다.
그녀도 나를 본 듯 눈이 커진다. 나이가 들어서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그녀를 본 순간 알아챘다. 순진한 얼굴로 얼굴을 붉히면서 울던 그녀. 옷을 벗으며 울부짖던 그녀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녀의 가족과 그녀. 하린이가 다가온다.
“엄마! 왜 그래?”
엄마? 그녀의 딸인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소연이 배고프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결혼했구나. 벌써 저렇게 큰 딸이 있구나. 그녀의 딸은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지나치며 눈동자를 마주쳐온다. 그녀가 눈으로 말을 걸어온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나도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그녀의 눈빛에 가슴속에 박힌 녹슨 못에 녹이 떨어져 나간다.
그녀가 지나갔다. 몇 년 만일까? 그렇게 찾아도 찾지 못했던 그녀를 이렇게 우연히 볼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녀였는데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다시 그렇게 떠나보낸다.
아기 옷을 살피던 아내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건다.
“여보~ 이 옷 예쁘죠? 예쁘죠?”
아내가 조그마한 아기 옷을 들어 보이며 나를 보고 웃는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였나.
그녀의 웃는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녀가 그런 내 모습에 의아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왜, 왜 그래요..?”
그녀의 수줍은 미소가 깊게 박혀있던 녹이 떨어져 나간 못을 조금씩 빼낸다.
“아니. 너무 예뻐서.”
“...”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흘릴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져준다. 그녀가 안겨 오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사람 많은 그곳에서 울며불며 내 가슴을 때린다.
“흑흑.. 이.. 흐윽..”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을 흘려가며 내 가슴을 때려온다. 그 손길에 박혀있던 못이 점점 더 빠져나온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준다.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빨리 가서 아기 만들자.”
아내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껴온다.
이제 거의 다 뽑힌 못을 잡고 빼 든다. 지난 몇 년간 나를 괴롭히던 못을 빼냈다. 지긋지긋한 놈.
못을 저 멀리 집어던진다. 못을 빼고 나니 그 못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과거와 집착.
못이 빠져나간 구멍에 바람이 들어온다.
과거와 집착이라는 못은 이제 내 가슴속에 없지만, 그 못이 남겨 놓은 구멍은 아마 영원히 없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그 구멍의 이름은 못이 빠져나가자마자 생겨났다.
추억과 그리움. 이제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과거와 집착 대신 추억과 그리움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와 집착이라는 못이 남긴 추억과 그리움이라는 상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를 쳐다본다. 뒤를 돌아 이미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생각한다. 팔짱을 풀고 아내의 손을 꽉 움켜잡는다. 그리고 그녀를 놓아준다.
하린아… 안녕… 잘가…
이제야, 진짜로 너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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