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기러기 영수
외기러기 영수
박영수는 회사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퇴근하지 않는 사람에 가까웠다.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 모니터 불빛만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가족이 없는 사람 같았다.
“차장님, 아직 안 가세요?”
김미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퇴근길에 불 꺼진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 응. 좀만 더 하고 갈게.”
“또 밤새세요? 얼굴이… 진짜 안 좋아 보여요.”
미애가 다가와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영수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스김, 너는 왜 아직 안 갔어?”
“차장님 혼자 계실 것 같아서… 걱정돼서요.”
영수는 피식 웃었다. 걱정. 2년째 듣지 못했던 단어였다.
“나 괜찮아. 그냥… 일이 많아서.”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침에 메일 보니까… 또 밤 3시에 보낸 거 있더라고요.”
미애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영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평소엔 그냥 예쁜 후배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차장님… 명숙 언니랑 형식이는… 잘 지내요?”
영수의 눈이 흔들렸다. 명숙. 형식.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두 사람.
“응… 잘 지내지. 돈 잘 보내고 있으니까.”
“전화는… 자주 하세요?”
“…요즘 좀 뜸해.”
미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좀 이상한 꿈 꿨어요.”
“꿈?”
“네. 차장님이… 혼자서 울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제가 안아주니까… 갑자기 웃으시는데…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어요.”
영수는 말문이 막혔다. 미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차장님… 저… 사실 오래전부터…”
미애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영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미스김. 내가… 너무 무심했지.”
“아니에요. 제가… 너무 앞서간 거예요.”
그날 밤,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조용한 호프집으로 향했다. 맥주잔이 비워질수록 말이 많아졌다. 영수는 처음으로 명숙과 형식 이야기를 꺼냈다. 미애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형식이… 이제 영어도 엄청 잘한다더라. 명숙이도… 현지에서 골프까지 친대.”
“좋으시겠어요.”
“…근데 가끔… 내가 필요 없는 사람 같아.”
미애의 손이 영수의 손등 위에 살짝 올라왔다.
“필요해요. 여기… 누군가는 차장님이 필요해 하잖아요.”
영수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따뜻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점심도 같이 먹고, 퇴근길도 같이 걷게 됐다. 미애는 영수의 셔츠 구깃구깃한 부분을 펴주고, 영수는 미애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애가 먼저 말했다.
“차장님… 저… 오늘 좀 취하고 싶어요.”
영수는 웃었다.
“그러자.”
그날 밤, 두 사람은 모텔에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미애가 영수를 끌어안았다.
“차장님… 나… 오래 기다렸어요.”
영수는 미애의 입술을 덮쳤다. 2년 만에 느껴보는 여자의 온기. 미애의 블라우스 단추가 하나둘 풀렸다. 영수의 와이셔츠도 벗겨졌다.
침대 위에서 미애가 위에 올라탔다. 천천히 움직였다. 영수는 미애의 허리를 잡았다. 미애의 신음이 방 안을 채웠다.
“차장님… 나… 좋아해요.”
영수는 대답 대신 미애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명숙아. 형식아. 아빠… 이제 좀 살아보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영수는 미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계속 이렇게 지내자.”
미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장님.”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출근했다. 같이.
영수는 더 이상 혼자 남지 않았다. 미애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