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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그믐밤

주소야 (1.♡.30.206) 7 420 0 0 2026.01.29

칠흑 같은 그믐밤


오 년 전이던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지금도 묻고 있다. 너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가?

열아홉의 나는 온몸의 껍질을 뒤집어 먼지를 털어내듯 퍼억퍼억 내리치고 싶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의 나날이었다.

눈앞의 책 더미와 회색빛 미래가 겹쳐지면 한순간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저자거리 한복판에 서서 불을 붙이고 싶었다.

거리는 최루탄 매연으로 가득했고 뻐억뻐억 군화 소리가 메아리쳤다. 도서관 창밖 교정은 붉은 머리띠를 두른 핏발 선 눈동자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책은 허접했고, 슬픔이었고, 절망이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초라하고 유치한 몰골로 숨을 죽이며 자신의 가슴을 잘라 먹는 불쌍한 묵조가 되어 있는가?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내 인생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내게 주먹도, 힘도, 높이 외칠 목청조차 없는가?

마신 술과 급하게 들이부은 포기가 아직 썩기를 거부하는 몸뚱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다시 기어 나오려 한다.

골목길 희미한 백열등 아래 동전 두 닢짜리 전구보다 못한 야비하고 추접한 인생을 쥐어뜯으며 땅을 두드렸다.

들이받아본 전봇대보다 나약한 껍질은 어김없이 붉은 자본을 드러내며 찢어졌다.

죽을까? 이렇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숨이 멎는 고통보다 더한 역겨움은 숨이 멎는 순간 아득한 깊은 곳에서 삐죽삐죽 고개를 드는 공포였다.

먼지도 바람도 불지 않는 골목의 가로등 아래 눈물이 흐르는 것은 왜일까?

슬픔도 먼지처럼 걸러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 눈물을 더 많이 뽑아내면, 아니 눈을 뽑아버리면 아예 지금의 아픔을 잊을 수 있을까?

패배자인지, 장외자인지, 가련한 약자인지… 훗날 누군가 나를 심판할 때 나는 어디에 들러붙어 나를 변론할까? 비열한 도망자라고 할까?

아랫배가 아프게 잡아당겨 휘어진 등에 작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닿는다. 가볍게 토닥거리는 움직임이 더없이 편안하다.

“하지 마세요… 난 가치 없는 패배자입니다.”

“…………………………”

말없이 등을 두드리던 손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이어진다.

“싫단 말입니다, 싫다구요. 난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는 파렴치란 말이에요.”

“…………”

“대체 누군데 이러시는 거지요? 누구세요?”

“…………”

방금 토해놓은 토사물을 깔고 앉으며 몸을 아주 힘겹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눈가에 칠한 화장이 검게 번져 눈인지 색안경인지 구분하기 힘들고, 입가의 연분홍 립스틱이 온통 턱을 도배한 모습이 광대처럼 보였다.

방금 술을 마시던 개천가 작부집 옆자리 여자라는 걸 알아내는 데는 머리를 두어 번 휘휘 젓고 나서였다.

“그만하세요. 고마워요.”

“…………”

“들어가세요. 왜 따라 나오셨어요?”

“…………”

“난 이제 가렵니다. 가고 싶어요.”

대답 대신 그녀의 따뜻한 손이 겨드랑이를 열었다. 그다지 힘들지 않은 몸짓으로 술에 취해 늘어진 비열한 몸뚱이를 들어 올린다.

끌려가듯, 따라가듯 하면서 밤하늘의 설핏하게 시린 안개를 눈속에 넣고 싶었다.

목이 마르다. 입안에 잘게 부순 자갈이라도 가득 채운 듯 아프다.

눈을 뜨고 천장의 쥐오줌 자국과 파리똥 자국을 보니 내가 늘 눕던 곳이 아니란 걸 알았다.

어디일까?

눈 옆으로 푸른색 줄 두 개 사이에 ‘복’이라는 한문이 들어온다.

사발을 들이미는 손가락 마디가 말라서인지 빈 사발일 거라는 의구심이 든다.

“…………누구세요? 여기가 어디지요?”

입안을 헹구듯 하며 급히 들이킨 물이 식도를 다 넘어가기도 전에 말이 되어 나오는 예절이라는 딱지를 비웃었다.

“…………”

“미안합니다만 여기가 어디입니까?”

“…………”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 단정하게 빗어내린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얼굴.

머릿속의 온갖 단어와 조잡한 것들을 부지런히 정리하여 지금 깨어나기 전의 기억까지 이르는 데는 담배 한 개비를 꺼야 할지 더 피워야 할지 망설일 즈음이었다.

한켠에서 물이 빠진 원피스 자락을 잡아내리며 무릎을 세우기도 하고 접기도 하며 가끔은 방바닥의 파리똥 자국을 손가락 끝에 문지르던 여자가 문득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를 외로 꼰다.

“미안해요………… 전 돈이 없는데… 어쩌지요?”

“…………”

뱉어버린 말을 쩝 하고 아랫입술 사이로 내리누르며 무안하게 아직도 덮고 있는 이불 자락을 주물럭거려 본다.

“이리 오세요.”

“…………”

익숙치 않은 손짓으로 그녀의 팔뚝 언저리를 잡아 끌었다. 말없이 미끌리듯 이불 속으로 들어온 여자.

팔을 내어 고개 밑에 넣어 주었다. 이두박근을 넘어온 고개가 턱을 밀며 떨어진다.

할 일이 없던 손을 들어 등을 잡아 주고 천천히 어루만져 보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저만치 두 평이 될 듯한 넓이의 방에서 문을 열고 나가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열일곱 번인가 밥을 먹은 듯하다.

방 안의 뚜껑 달린 요강에 대변도 보고 소변도 보고 하며 잠만 잔 듯하다.

깨어 있을 때는 말없이 땀도 없이 그녀의 몸에 올랐다.

한 마디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레인지 엿새인지 모를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도 거기에 가면 그녀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희미하게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물빛 바랜 원피스를 입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묻고 있다.

너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가?

칠흑 같은 그믐밤, 담배 연기 한 줄기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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